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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한담] 소리 없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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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기획홍보분과 작성일22-08-11 19:35 조회3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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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직업상 연주 여행으로 끊임없이 낯선 장소·언어를 접하는 긴장된 삶을 삽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디든 성당을 찾아 들어가면, 내 집에 온 듯한 평안함을 얻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말이 안 통해도 마음을 누일 곳이 있다는 것은 부모님께 받은 가장 소중하고 감사한 유산이지요. 그리고 성당을 나서기 전 반드시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바로 촛불을 하나둘 밝히는 것입니다.

 

촛불은 어릴 적 어머니와 바치던 저녁 기도로 늘 익숙했습니다. 여느 아이들처럼 저희 삼남매도 불을 서로 켜고 끄려고 했지요. 기도가 끝나면 초 안에 가득 찬 촛농을 따라 내고 말랑말랑해진 윗부분을 칼로 도려내어 그 온기가 남아 있는 동안 손에 쥐고 놀기도 하고요. 커서는 기도하다 말고 종종 촛불을 가만히 바라보곤 했는데, 미세하게 흔들리는 아주 작은 빛은 오래 보아도 지루하지 않고 신비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초를 밝히면 그 작은 예식으로 기도의 마음이 더 경건해지는 듯했고요.

하지만 성당에서 돈을 넣고 초를 켜두는 것이 미신 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으면 어떡하나 가끔 염려되었습니다. 초를 밝히고 소원을 비는 행위는 천주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또 샤머니즘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촛불이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상징한다는 것은 알지만, 초를 켤 때마다 내가 매번 이를 잘 인식하고 있는지, 준비된 초에 대한 고마움으로 넣은 작은 돈도 혹여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습니다.

그러다 한 오스트리아 신부님이 교구 소식지에 기고한 ‘왜 교회에서 촛불을 밝히나?’라는 글을 읽게 되었어요. “밝혀진 초는, 내가 성당을 떠난 후에도 계속 기도하며 타오르는 ‘연장된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또 사랑하는 이의 죽음, 사고 등 극한 상황에 놓이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을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촛불을 하나 밝히는 것은 좋은 ‘침묵의 기도’가 되지요. 기도는 언어로만이 아니고 ‘행동’으로도 바쳐집니다. 내가 집을 나와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돈을 헌금함에 넣고, 초를 하나 밝히고, 잠시 말없이 서서 타오르는 초를 바라보는 것, 이 모든 것이 기도입니다!”

아, 소리 없는 촛불 기도! 그 덕에 좋아하는 촛불 켜기가 한결 더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베를린 성당, 촛불 앞에 놓인 기도문이 눈에 들어왔어요. 가만히 서서 그 문장들을 읽어 내려갔을 뿐인데 그대로 기도가 되었습니다! 꼭 제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거든요. 어떻게 청하면 좋을지 알려 주니 기도의 바람도 그리로 향했고요! 제가 좋아하게 된 이 독일어 기도를 부족한 번역으로나마 소개하고 싶습니다.


하느님, 제가 초를 하나 밝힙니다.
어떤 기도를 하면 좋을지 제가 어쩌면 잘 모를 수도 있어요.
(다만) 이 초는 저와 제가 가진 것의 작은 일부입니다.

이 촛불이 빛이 되기를 청합니다,
당신께서 그 빛으로 제 안의 어려움과 제가 해야할 결정들을 환하게 밝혀주시기를.

이 촛불이 불이 되기를 청합니다,
당신께서 그 불로 제 안의 모든 나쁜 것을 태우셔서 그로부터 좋은 것과 새로운 것이 생겨나기를.

이 촛불이 불이 되기를 청합니다,
당신께서 그 불로 제 마음을 따뜻하게 하시고 제게 사랑을 가르쳐주시기를.

하느님, 저는 이 성전 안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께 내어드리고 싶은 저의 한 쪽이 이 빛과 함께 여기 머물러 있기를요.
저의 기도가 제 자신 안에서 또 저의 하루 일과 안에서 계속되도록 도와주세요. 아멘.



가톨릭신문 2022-08-10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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