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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에게 들어보는 '사제 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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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기획홍보분과 작성일22-08-06 10:07 조회3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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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내고 있다.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사제 성화의 날을 맞아, 사목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며 내·외적 갈등을 겪지만 매순간 성찰과 결심, 실천을 통해 자기 성화를 위해 노력하는 두 사제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세속화와 성직자 중심주의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종의 대답은 주저함이 없다. 대답이 명료함은 자의식에 대한 이해가 투명하고 성찰과 번뇌의 시간이 농익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세속화와 권위주의는 사제의 생활과 교회 운영 방식의 문제에 이른다. 오늘날처럼 교회와 사제의 권위가 추락되고 시민사회로부터 빈정거림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다. 위로부터의 개량적 분위기건 아래로부터의 개혁이건 결국 ‘나로부터의 혁명!’ 외에 대안은 없다. 출발점을 찾는 것은, 신학교 입학 면접 때나 서품면담 때에 받던 원천적 질문, 즉 사제로서의 삶의 목표 앞에 자신을 세워야 가능하다.

“사제, 수도자의 덕목은 무엇입니까?”
‘체 게바라’는 혁명가의 덕목에 대해 “사랑이지요. 혁명의 목표가 사랑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투쟁과 혁명의 이유와 목적이 분명해야 답을 얻는다. ‘사제, 수도자의 덕목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역시 사제로서의 삶의 이유와 목표가 뚜렷하면 대답 또한 명료할 것이다.

개신교 젊은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동시성’(同時性, Synchroneity)이라 한다. “진실로 예수를 믿는다 함은 2000년 전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온전히 결합된 모습”이라는 의미다. 여성신학자 이은선 교수는 수행에 대해 ‘聖-誠-性’ 이라는 표음 언어로 말하길, “육신적 욕망의 인간 본성(性)에서 출발하여 지극한 의지(誠)를 통하여 ‘거룩함’(聖化)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다. 목표 정향이 분명한 의지의 삶이 ‘성화에의 길’이다.

■ 생태계적 토대 위에 사는 사제직

우리 모두는 좋은 사제들이다. 부모님의 사랑으로 태어나고 성장한 가정의 자녀이며, 교양인이자 민주시민이고, 지성인이고 종교인이며, 예수의 제자인 그리스도교 신자다. 그리고 공동체로부터 선발된 사제다.

사제는 위로 올라갈수록 소수인 계단형의 위쪽에서 살아간다. 이건 계급이 아니라 ‘생태계적 토대’다. 토대의 위에 있는 자는 죽어도 먼저 죽고, 도망가도 마지막에 뛰게 되는 관계성을 이룬다. 멍에는 가볍지만 두려움은 크고 의무감은 무겁다. 맨 위쪽이 그리스도라면 사제는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토대를 위해 헌신하는 섬김의 자리에 위치한다. “신부이기 전에 인간이 되라!”는 말은 토대 위에 존재하는 생태적 관계성을 지적하는 말이다.

■ ‘공감능력’과 ‘자기성찰능력’

덕행의 본질과 핵심은 공감 능력이다. 공감은 다른 개체가 ‘하나의 몸’으로 느껴지는 ‘동시성’의 감정이다. 공감은 최고의 영적 정화의 상태다. 공감의 힘이 있어서 사랑, 사람이 된다. 성찬례는 최후 만찬의 기억과 회상으로 주님 현존을 만나게 하는 ‘공감의 성사’다.

공감은 마음과 영(靈)의 형상 활동이다. 공감 순간에 하느님의 영이 임재한다. 딸은 어머니의 김장김치에서 부모의 노동, 땀과 수고를 공감한다. 영성체는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의 눈물을 먹고 마시는 공감과 현존의 순간이다. 미사예물을 받은 사제가 눈앞의 제물에서 영적 공감을 못한다면 제병과 포도주가 어떻게 2000년 전 주님의 성체성혈이라 선포할 수 있는가? 그건 기만이다.

사제는 자기 삶의 태도에 대해 살필 줄 아는 양심과 도덕의 담지자다. 넘어질 수 있지만 무엇에 걸렸는지 보고 다시 일어나는 것은 중요하다. 자기 삶의 궤적을 돌아보는 성찰 능력은 신앙의 수행, 성장과 성화를 가늠하는 척도이자 용서와 화해의 힘이다.

※ 박기호 신부는 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로, 1991년 사제품을 받고 1998년 ‘예수살이 공동체’를 설립했으며, 2006년부터 충북 단양 ‘산 위의 마을’에서 기도와 노동, 공생의 삶을 살고 있다.

어느 월요일 이른 아침, 너덧 명의 사내들이 사무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이닥쳤습니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예상대로 도청 감사과에서 조사 나온 30·40대의 공무원들이었습니다. 몇몇 직원이 그들 앞을 가로막고 항의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제가 나서야 했습니다. 로만칼라를 앞세우고 고함을 쳤습니다.

“뭐 하는 짓입니까! 사전에 연락도 없이 이렇게 막해도 되는 겁니까! 돌아들 가세요. 우리는 감사 거부합니다!”

완강한 저항에 당황한 도청 공무원들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아마도 로만칼라를 찬 신부를 보고 당황한 것 같습니다) 낯익은 시청 공무원이 저에게 다가와 작지만 단호한 소리로 “신부님, 죄송하지만 받아들이셔야 합니다”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저는 그 공무원을 끌고 가다시피 저만치 가서 말했습니다.

“하루만 시간을 늦춰 주십시오. 그러면 모든 걸 받아들일 테니까요!” 빠르고 찌르는 듯한 말투에 공무원이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잠시 후 도청 공무원들은 시청 공무원을 따라 사라졌습니다. 사건의 전모를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사건은 단순하지만 풀기가 어려웠습니다. 교구에서 위탁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에서 평신도 시설장과 몇몇 직원에 의한 횡령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직원들은 관례라고 생각하며 행해 오던 일들이, ‘가랑비에 속옷 젖는다’고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꽤 규모가 큰 횡령 사건이 됐습니다. 저는 다른 복지기관장으로 일하던 중 사건이 터지자 수습 차원에서 파견됐던 것입니다. 결국 시설장 이하 몇 명의 직원이 사표를 쓰고, 횡령액을 전액 교구에서 메꾸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습니다.

저는 1992년에 서품받고 꼬박 30년 사제 생활을 했습니다. 그중에서 17년 간 사회복지 일을 했습니다. 사회복지사 1급, 저의 은근한 자부심입니다. 사회복지를 통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웃이나, 정신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은총이며 보람입니다. 하지만 이 생활이 너무 오래되다 보니 사목자인 신부가 경영자로 변하고, 하느님 말씀을 전해야 할 사제가 자기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자식들을 위해서 소중한 한 끼 식사를 마련하던 어머니가, 자식들이 모두 떠나고 혼자 남으니 식사를 대충 하게 된다는 광고를 봤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혼자 미사를 하게 되니 강론이 없어졌습니다. 강론하지 않으니 그날 복음을 묵상하지 않게 됐습니다. 말씀의 성찬이 초라한 ‘혼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사회복지 일을 마무리하고 본당으로 돌아온 지 3년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영적 자녀인 신자들을 위해서 말씀을 정성껏 요리하고, 한상 푸짐하게 차려내기 위해서 많은 묵상을 합니다. 이것은 신자들에게 뿐 아니라 사제 자신에게도 큰 은총이며, 성체의 성찬에 버금가는 영적 양식입니다.

사회복지 일을 하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어려움에 부닥친 수많은 사람들에게 눈에 드러나는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하느님 사랑을 깨닫고 스스로 넓어짐을 체험했습니다. 스스로 ‘소영웅’이 된 듯한 교만을 체험했습니다. 그 속에서 한계에 부딪힌 제 영혼을 만났습니다. 이제 본당에서 신자들과 나누는 푸짐한 말씀의 식탁에서 제 영혼이 깊어지도록 은총을 구합니다.

※ 백남해 신부는 1992년 사제품을 받고 마산교구의 장애인복지관장과 사회복지국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마산교구 창원 대방동본당 주임으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22-06-15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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