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완 신부의 세상을 읽는 신학] 인연의 형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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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기획홍보분과 작성일23-10-11 09:30 조회35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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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의 인연들
인연을 맺는 방식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작동됩니다.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에는 핏줄, 고향, 학교라는 요소가 관계의 주요한 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나면 자신이 꾸린 가정, 직장 동료, 같은 직업군의 사람들과 주로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종교와 취미의 영역도 관계 형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인연에 영향을 미치는 외적 요소들은 사람마다 조금 다르지만, 살아가면서 인연을 맺는 방식은 변해갑니다. 요즘 저를 보면, 혈연과 고향을 매개로 맺은 인연들이 옅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사제로 살다 보니 학창 시절의 친구들 역시 멀어져 갑니다.
사람은 지금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주로 인연을 이어갑니다. 사람과의 관계에는 공간과 물리적 거리가 중요한 요소입니다. 가까이에서 자주 보지 못한다면 아무래도 인연의 고리가 조금씩 약해지겠지요. 자신이 살아가는 자리에서 부딪치며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들이 현실적 인연입니다. 현재라는 시간과 몸이 위치하는 물리적 반경이 인연과 관계 형성에 가장 깊은 파동을 만듭니다.
사람의 인연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잘 넘어서지 못합니다. 하지만 인연의 깊이와 친밀성이 반드시 물리적 환경과 조건에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살면서 한 번 만나지도 않은 사람에게 어떤 친밀성을 느끼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저는 주로 읽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글을 통한 인연이 저에게는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고전과 옛사람들의 글을 읽는 것도 좋지만, 저는 저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글이 좋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이 시대를 읽고 당대적 삶을 해석하는지 궁금합니다.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의 죽음 앞에서 다른 혈연적 친인(親人)의 죽음 때보다 더 깊은 슬픔을 느꼈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 시대의 삶과 문학에 대한 그의 성찰과 혜안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혈연의 친인보다, 직무의 친인보다 글을 통한 친인이 더 가까울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컴퓨터를 켜면 습관적으로 들어가 글을 확인하는 블로그들이 있습니다. 인문학자 이현우, 철학자 김영민, 철학자 김영건 선생의 블로그입니다. 이현우 선생을 통해 인문 서적들의 동향을, 김영민 선생을 통해 사유의 명민함과 창의성이 무엇인지를, 김영건 선생을 통해 개념과 실재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와 논리적 사유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얼마 전 김영건 선생이 타계했습니다. 은평성모병원 사진과 “나는 지금 여기에 누워 산소 가자는 하늘을 보고 있다. 그런데 많이 아프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글이 블로그 마지막 포스트였습니다. 마지막 글에 달린 댓글들을 통해 그가 제자들에게 얼마나 훌륭한 교수였는지, 그의 블로그 글들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의 글에 한 번도 댓글을 달지 않았지만 늘 그의 글을 눈여겨보는 나 같은 사람들도 꽤 많으리라 짐작됩니다.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그를 잘 알지도 못하지만, 그의 죽음이 슬펐습니다. 그의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사유를 다시는 접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습니다.
■ 시(詩)의 인연들
좋아하는 시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시집을 낼 때마다, 반가움과 기쁨으로, 사서 읽습니다.
김명인 시인이 그 하나입니다. 얼마 전 그의 열세 번째 시집 「오늘은 진행이 빠르다」(문학과지성사)를 즐겁게 읽었습니다. 시를 통해 시인의 인식과 정념과 사유의 궤적을 읽는 일은 적어도 저에게는 세상과 인간과 삶을 읽는 여정의 하나입니다. 한 시인의 전체 시집을 따라 읽는 일은 그의 삶의 궤적을 읽는 일이기도 합니다. 만난 적도 없고 교류한 적도 없지만, 수십 년 동안 그의 시를 읽어왔기에 오래 알고 지내는 지인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시인의 시선 속에 자주 들어오는 풍경은 길과 강, 들판과 바다 같은 세월의 흐름과 풍화와 막막함을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세월을 의식하는 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그 본성상 비극적 존재입니다. 흐르는 시간 속의 존재인 인간의 근원적 정서와 정념은 슬픔과 쓸쓸함입니다. 김명인 시인은 다른 어떤 시인보다 인간의 쓸쓸하고 슬픈 정념을 잘 포착하는 시인입니다. 끊임없이 삶의 풍경을 읽고 그에 반응하는 내면의 의식을 응시하는, ‘비극적 견인주의자’ 같은 시인입니다.
김명인 시인은 나이가 들어도 삶을 읽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노년의 시간은 빠르고 때론 헛헛하지만 그래도 시인은 여전히 읽어가는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건져 낸 것 하나 없이 또 하루가 흘러간다.” “오늘은 진행이 빠르다/ 기념되는 날은 흔치 않다.”(‘구름척후’) 삶은 읽기 어렵고, 해답과 결론이 나지 않지만, 그래도 시인은 끝없이 묻고 관찰하고 읽어갑니다. “나는, 달을 관찰하며 살아왔다.” “누리의 달도 저무는 달도/ 지상의 표징으로만 읽어낼 뿐,/ 감기는 눈을 비비며/ 오늘 밤도 저 달이 유장한가, 지켜보는 것이다.”(‘달의 이행’) “평생을 새겨도 독해 버거운/ 비장의 어둠일까.” “오늘 밤에도 누군가는 등대를 켜고 앉아/ 첩첩 어둠을 읽고 있겠다!”(‘죽변도서관’)
“뭉개고 갈 지상의 좌표 몇 군데나 더 남았는가?”(‘비운다는 것’)를 묻는 시간에 이르면, 즉 소멸을 느낄 때쯤이면 인간은 누구나 우주적이 되나봅니다.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종시終詩’)라는 박정만 시인의 이 짧은 시는 김명인 시인에게서도 자주 변주됩니다. “일찍이 접합되지 못한 우주에 사로잡혔으니.”(‘초점의 값’) “흘러간다, 1억 광년 건너온 별빛도/ 밤하늘에 피어오르는 별자리도,/ 말문조차 닫게 하는 우주의 황홀이/ 오늘 밤은 한층 가까이 있다.”(‘이 구역과 저 별무리가 한통속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느 영원에서 다시 만날까?’)
■ 생각을 나누는 인연
시간과 공간을 함께해도 생각과 마음을 나누지 못하고 삶을 공유하지 않으면 그 인연의 깊이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인연의 무게와 폭은 단순히 외적 요인들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수록 생각을 솔직하게 나눌 수 있는 인연들의 소중함을 거듭 절감합니다. 어떤 요인들에 의해 발생한 인연이든지 간에 생각을 나누고 일상을 다정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인연은 깊어진다는 것을 확연히 깨닫습니다.
신앙의 인연,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으로 함께하는 물리적 시간만큼이나 생각과 말의 정직한 나눔과 교류가 중요합니다. 생각을 나누지 못하는 인연은 껍데기에 머무를 위험이 있습니다.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는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하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합니다. 생각과 공부가 사라진 시대여서 오늘의 우리 인연들과 신앙이 깊지 못하고 얕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뜬금없는 생각을 합니다.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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