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9일 주보 2면) 새 세례자 소감문(정연우 그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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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기획홍보분과 작성일19-12-27 14:46 조회1,62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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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눈
어느 날, 커다란 떡갈나무 숲에 작은 씨앗 한 알이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리고 가지를 뻗고 잎을 내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 나무는 주변에 높게 자라난 떡갈나무의 큰 키와 많은 가지에 달린 넓은 잎으로 자신이 받고 싶은 만큼의 빛을 받아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넓은 잎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이라도 받기 위해서 준비되지 않은 잎들조차도 줄기에서, 가지에서 마구잡이로 내어놓았습니다. 그 작은 잎들은 삐죽삐죽 비틀어지고 날카로워 보였습니다.
작은 나무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소나무야, 내 잎들은 넓적하지 않잖아. 왜 떡갈나무 숲에 떨어져 살 게 되었지? 나는 산등성이 바위틈에 떨어져서 많은 빛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데 왜 내게 필요도 없는 비옥한 땅인 떡갈나무 숲에 떨어져 살고 있단 말인가?'
그렇게 자신의 처지를 불평과 불만으로 보내며 부족한 빛을 채우려고 더욱더 줄기든 가지든 어디에든 덜 성숙한 잎들을 내보냈습니다. 일반적으로 건강한 나무는 줄기에서는 잎을 내지 않습니다. 그건 불필요한 에너지의 낭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키 큰 떡갈나무 잎들이 시들고 말라서 땅 위로 떨어졌습니다. 작은 나무의 머리 위로 온전한 하늘이 드러나 보였습니다. 작은 나무는 이제껏 목말라 했던 빛을 마음껏 받기 위해서 잎들을 활짝 펼쳐 보았습니다.
그에 펼쳐진 잎들은 뾰족뾰족한 바늘 잎들이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못한 타원 형태의 잎이었습니다. 작은 나무는 그때서야 자신이 주변의 키 큰 떡갈나무들과 같은 나무였고 다만 늦게 잎들을 내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늦게 잎을 틔운 성급한 마음에 온전한 잎들이 아닌 작은 잎들을 내보냈고 그래서 더더욱 빛을 욕심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불안과 불만의 삶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변의 다른 떡갈나무들도 서로의 넓은 잎들 사이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들을 받기 위해 공간을 배분하며 자신들의 줄기를 열심히 키워나갔고 가지에 넓은 잎을 내놓을 수 있는 순간에 이르렀을 때야 잎을 내놓았다는 것을 작은 나무는 알았습니다. 따뜻한 빛이 존재하므로 살아있음에 감사하지 못하고 더 많은 빛을 받지 못함을 불평했습니다. 줄기를 키우려 하지는 않고 줄기와 빈약한 가지에서 미성숙한 잎들을 내어놓고 자신의 처지를 투정 부리던 작고 어리석은 나무가 나 자신이었음을 지천명을 넘어선 나이에서야 깨달았습니다.
겨울이 되면 나무는 한 해의 마무리로 그해에 맺은 잎들과 열매를 모두 떨구고 다음 해의 삶을 위해서 겨울눈이라는 것만을 가지 끝에 남겨둡니다. 나무에 있어서 겨울눈은 그들이 수억 년 삶을 유지해 온 지혜의 정점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 겨울눈은 사실 무더운 여름부터 준비해서 가을을 거쳐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나무의 보이지 않는 준비의 시간이자 인고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런 겨울눈을 보고 있으니 올여름 주님을 만나고 가을을 거쳐 겨울에 주님의 자녀로 세례를 받은 저와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삼학년 아들을 위해 백일기도를 결심하고 예비자 교리 과정을 시작했기에 처음엔 아들의 합격을 원하는 기도의 내용이 주를 이뤘습니다. 하지만 예비자 교리 과정을 하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저 자신의 어리석음과 교만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 자신을 향하는 눈보다는 타인의 눈에 보이는 것들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살고 있었기에 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자신을 합리화할 때도 있었고, 세상과 타협점을 찾지 못해 방황하며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죄를 저지르고 살아온 제 영혼도 주님께서 받아 주실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주님께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며 노력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매일매일 그분을 찾아 미사에 참석하며 기도했습니다. 제 마음에 주님의 평화를 기도로 부탁드렸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는 제가 그분께 등 돌리고 걷고 있을 때도 저를 향한 사랑의 빛을 거두시지 않으셨음을 느꼈습니다. 그런 빛의 말씀으로 저의 잘못된 생각과 제가 품어왔던 모든 부정적이고 잘못된 감정들이 낙엽이 되어 하나씩 떨어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어가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분명히 누구나 다 아는 단어로 쓰여 있는데 그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주임신부님이신 이재돈 세례자 요한 신부님께서 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으로 이해하려하니 이해하기 어렵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그동안 제가 성경을 잘못된 자세로 읽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여태껏 성경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지식으로만 성경을 받아들이려 하고 마음으로 깨달아가며 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적지않은 나이인 이제라도 예수님의 참사랑이 있었기에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고, 남아있는 삶의 방향을 올바르게 잡을 수 있었음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내년 봄을 위해 겨울눈을 준비한 나무처럼 저도 다음 삶을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새로운 가지와 잎과 꽃을 피우고 하느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늘 빛을 비추어 주시며 저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 2019.12.14 정연우 그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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