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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분과 ~ 청년 예비신자 성지순례(청년 선교단 예그리나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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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기획홍보분과 작성일22-05-30 18:08 조회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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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성지순례는 일반적으로 유다교인들이 해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등에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가 수확한 곡식을 바치던 행위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진다. 신약 시대에는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여진 로마 순례가 보편화되었고, 구약 시대 이스라엘 민족들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하느님과 상의하기 위해, 축복받기 위해 순례를 이어갔다. 신약에 들어서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기 위해 그 사건들이 일어났던 근원적인 장소들을 찾아가고자 하였으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이후로는 속죄 차원에서 진행하는 순례가 일종의 신심 형태로도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흠숭과 회개의 행위, 성인에 대한 존경, 영적 은총을 받기 위한 실천 방법 등으로 성지순례의 폭을 넓혀왔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경우 전통적으로 순례는 ‘회심의 여정’이라 하는데, 대부분의 순례는 깊은 영적 변화를 갈망하면서 자신의 내적 불안함을 돌아보고,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으로 출발하기 때문이다.성지순례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해 나선 여정이다. 그리고 이 여정은 하느님의 사랑을 일상 한가운데로 끌어당겨 실천하는 모습으로 이루어질 때 마무리된다.

【 ​도보 성지순례 】 

성지순례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어떻게 신앙을 지키셨고, 우리는 어떠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지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묵상하고, 하느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는 성지순례는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은총이다.도보 성지순례는 오로지 두 발만으로 성지를 향해 걸으면서 고통과 갈등 속에서도 묵묵히 하느님만을 믿고 따른 우리 순교자들이 겪었던 고난의 길을 몸소 체험하므로 순교 영성을 더 깊이 있게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갖는 데 의미가 있다. 목숨까지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희생정신과 신심을 가슴으로 느끼고 배워 자기의 삶 안으로 체화하는 여정이다.순례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며, 때로는 주저앉고 다시 서기를 반복하고 기쁨과 슬픔을 스스로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더 많은 것에 감사하고 인생의 참다움과 자아를 찾아가는 인생 여정이다.

우리는 순례길을 걸으며 믿음 안에 기꺼이 자신들을 희생하신 성인들의 삶을 통해 참다운 신앙인의 모습을 배우고, 이 배움을 통해 우리의 삶도 진실한 변화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한 우리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세상에 드러날 것이고, 이를 통해 하느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또 다른 그분의 자녀들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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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동대성당 】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 대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자 최초의 본당으로 한국 교회 신앙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며,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후 이승훈, 정약전·약종·약용 삼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 집회를 가짐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이듬해,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고, 자신의 집에서 교회 예절과 교리 강좌를 열었는데 이로써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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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동대성당 - 지하 묘역                         

 명동대성당의 지하 소성당 묘역은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설계 때부터 계획된 시설로서, 각지에서 발굴된 순교자들의 유해가 1900년부터 이곳으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현재 순교 성인 다섯 분

(앵베르범 주교와 샤스탕 정 신부, 모방 나 신부의 유해 일부, 김성우 안토니오, 최경환 프란치스코 등)과 순교자 네 분(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의 유해와 기해박해의 이 에메렌시아와 무명 순교자 한 분) 등 모두 아홉 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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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동대성당 주보성인 - 무염시태 마리아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공로를 미리 입게 하시어 성모 마리아를 원죄에서 보호하셨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원죄가 없었음을 의미하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심을 가톨릭교회에서 1854년에 정식으로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루르드는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프랑스 도시 이름을 의미하며 성모님께서는 성녀 베르나데트 수비루에게 총 18번이나 나타나셨다고 한다. 성모님께 계속해서 이름을 여쭤보았으나 성모님께서 대답이 없으시다가 4번째 물음에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라고 답하셨다. 이는‘임마꿀레 꽁셉시옹(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라고도 하는데, 이 일로 인해 성모 무염시태 교리를 믿을 만한 교리로 반포하였다. 베르나데트 수비루는 사후 54년이 지난 1933년에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셨으며, 시성되기 전까지 시신이 전혀 부패 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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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범우의 집 터(장악원 터)                            

김범우의 집은 1784년 말 신앙 집회가 열렸던 곳이며, 김범우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증거자로 기록된 인물이다.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 공동체인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하였다. 1785년 봄 명례방 집회에 모인 이승훈, 이벽, 정약용, 권일신, 권철신 등이 형조의 관리들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던 김범우는 충북 단양으로 유배된 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1786년 선종하였다.

우리나라의 천주교 도입은 선교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독특하게도 학자들이 천주교에 관한 학문을 연구하다가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신앙 선조들은 1784년 교회 창설 직후에 명동대성당 부근의 명례방에서 교리 공부를 하고 기도하면서 신앙을 키웠다. 현재 명례방을 알리는 표석은 없지만, 중구 을지로 66 KEB 하나은행 본점 앞 장악원터 표석 앞쪽을 김범우의 집터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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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포도청 터 

우포도청은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이 희생된 곳이다. 기록상 우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으로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얻은 유대철 베드로 성인이 있다. 충청도 공주 지방에서 사목하던 드게트 신부와 신자들은 공주 감영을 거쳐 우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박해가 최고조에 다다랐던 시기처럼 혹독한 고문이 자행되지는 않았지만, 투옥된 교인들을 괴롭힌 것은 가혹한 굶주림이었다. 결국 압송된 신자들 중 이병교 레오, 김덕빈 바오로, 이용헌 이시도르 등이 우포도청의 옥에서 아사(굶주림)로 순교하였으며 이들이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이다. 또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가 순교를 앞두고 그의 마지막 옥중 서간을 작성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f81aa00d47fb3394a167aa2320ae3d3c_1653904807_8834.png

【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           

서소문은 조선시대 수도 한성의 출입 성문이던 네 개의 도성 대문과 네 개의 소문 가운데 하나인데, 왕래가 잦았던 서소문 밖의 네거리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어 범죄를 예방하려는 목적에서 조선 초기부터 한양의 공식 처형지로 지정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이래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천주교인들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기 시작하였으며,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신원이 확인된 이들만 해도 100여 명이 된다. 이 가운데 44위가 시성 되어 단일순교지로는 성인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다. 또한 2014년 시복된 순교복자 124위 가운데 27위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하였다. 한국 교회는 현재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순교자의 시복을 추진 중에 있다. ‘하느님의 종’ 133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와, 신유박해 때 ‘백서’를 작성한 황사영 알렉시오를 비롯하여 서소문 순교자 6위가 포함되어 있다.

1984년 103위 시성을 기념하여 서소문 공원 안에 순교성지를 조성하고 순교자현양탑(1999년)을 세웠으며, 2011년 서소문 밖 역사 유적지 관광자원화 사업을 시작으로 8년간의 노력 끝에 2019년 6월 1일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인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의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 공식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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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두산 순교성지 】                          

조선시대 때 산봉우리의 형상이 누에머리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잠두봉이라 불렸던 이곳은 가장 혹독한 박해로 일컬어지는 1866년부터 1873년까지의 병인박해 동안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됐던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성지 중 하나이다. 당시 수많은 천주교인의 머리가 잘려 숨졌다고 하여 ‘절두산(切頭山)’이란 지명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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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두산 순교성지 - 기념 성당 성인 유해실 】             

성당 제대 아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은 현재 27위의 한국순교성인과 1위의 무명순교자 유해를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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